[바다가 보이는 이야기] 안녕하세요 저는 이유정이고요 오늘 바다와 관련된 직업을 소개하기 위해 이렇게 나왔습니다 제 직업이 뭐냐구요 여러분들이 생일이면 드시는 미역 그 미역이 제가 숨을 참고 물질하여 잡은 미역들입니다 이제 감히 잡히시죠? 네 저는 제주도에서 해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해녀가 된지 4년 밖에 되지 않았어요 육지에서 평범한 회사원으로 일하던 제가 뒤늦게 푹 빠진 해녀라는 직업의 매력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앞으로 총 3개의 강의를 통해 해녀라는 직업에 대해 함께 살펴볼 건데요 첫 번째 시간인 오늘은 기본부터 차근차근 짚어보자는 의미로 제주 해녀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유정 現 해녀] [푸른바다 제주 제주해녀의 역사] 해녀란 아무런 기계장치 없이 오로지 자신의 호흡으로만 바다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행위를 직업으로 하는 여성을 말합니다 해녀의 본 고장인 제주에서는 이들을 잠녀 혹은 좀녀라고 부르는데요 저는 잠녀가 전통적 잠수문화의 상징이자 제주 여인 강인한 삶과 독특한 문화를 상징하는 결정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잠수,해녀 등으로 혼용해 온 용어는 2016년 유네스코 등재에 앞서 조례 개정을 하면서 해녀로 통일하게 됩니다 하지만 현재 제주 사회에서는 잠녀 좀녀라고 하는 제주어로 더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재 해녀의 대부분은 제주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저 역시 제주도에서 활동하고 있고요 하지만 해녀는 부산 및 남해 연안,동해 연안 멀게는 러시아나 일본에서도 활동하기도 한다고 해요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해녀들도 대부분 제주도에서 시작해 결혼 등의 이유로 지역을 옮긴 경우가 많은데요 우리가 해녀라고 하면 자동으로 제주해녀가 떠오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앞으로 제가 할 해녀 이야기는 제주에서 활동하는 제주해녀의 중점을 둘 예정인 점 참고해 주세요 제주해녀는 생각보다 그 역사가 정말 오래되었습니다 잡녀 즉 해녀라는 직업은 언제 처음 생긴 걸까요 5,6세기 제주에서는 진주와 전복과 같은 보석을 캐는 어업이 번창했습니다 이렇게 채취한 보석은 중국과 일본과의 교육에서 사용되는데요 막강한 자원을 등의 어부만큼 번영했으면 좋았을 텐데 10세기에 들어서 제주는 고려의 흡수 독립된 국가로서의 지위를 잃었습니다 하루아침에 그저 그런 고려의 일부 지방으로 전략해 버린 거예요 이때부터 제주는 외부의 경제적 착취와 환경파괴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남자들은 육지로 도망치거나 군역과 잡업에 동원되고요 여자들이 물질 생산의 주요 역할을 맡게 되죠 차라리 육지로 나갔으면 좋았을 텐데 하시는 분들 이때만 해도 여자는 출륙금지령으로 인해 제주를 떠날 수 없었어요 한마디로 섬에 고립된 거예요 그렇게 고립된 제주의 잠녀들은 미역을 캐거나 전복을 채취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제주해녀의 존재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처음 등장하는데요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우리나라 해녀의 역사는 신석기 시대 이후부터 확인되는 패총 유적 등으로 보아 이미 선사시대 때부터 행해졌을 걸로 판단되지만 해녀의 물질 기록은 1629년 이건 제주도 풍토기에서 처음 나온 뒤 탐라순력도 1702년에 물질하는 모습이 그림으로 등장합니다 고려부터 시작된 해녀의 역사는 조선시대에도 이어집니다 조선시대의 문헌에는 특히 해녀와 관련된 내용이 자주 나오곤 합니다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 3년인 1421년에 제주의 진상품목으로서 통째로 말린 전복,얇고 길게 저며 말린 전복 등 다양한 전복이 올라갔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이때 전복을 잡는 포작인들이 진상품목을 마련하는데 동원이 되면서 바다를 건너가 죽거나 힘들어서 도망가버리는 일이 생깁니다 진상은 해야 하는데 잡을 사람은 없고 이때 등장하는 게 잡녀입니다 전복 진상을 위해 미역을 따는 잡녀를 뽑아 포작인으로 대체한 거예요 이때부터 제주는 해녀 역할을 미역을 채취하는 해녀와 전복을 진상하는 해녀와 구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해녀의 시작입니다 조선시대 제주도에서는 전복만큼 미역도 많이 채취할 수 있었습니다 상인들은 미역 판매로 부자가 됐어요 미역이 보양식으로 사는 음식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해녀들의 의상도 덩달아 올라갔고 집안의 자랑이 되었죠 영조 40년인 1764년 작성된 탐라록에는 이런 이야기를 뒷받침할 기록이 남아 있어요 탐라의 여자애들 풍습에 혼인상대로 잠녀를 귀중히 여겨 잠녀를 둔 부모들은 우리 딸은 먹고 살 걱정이 없다고 자랑한다 강인한 여성 해녀들의 진면목은 일제 감정기 시절 더욱 빛납니다 우리 조상들이 일본의 해산물 착취에 맞서 항일운동을 벌이거든요 193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당시 해녀조합은 감태와 전복의 가격을 낮추려고 시도했고 해녀들은 항의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반발에 해녀조합은 정상적인 가격으로 구매를 해주겠다고 말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죠 결국 조합에 무성실한 대우에 반발해 1932년 1월 7일 하도리 해녀 300여명이 세월이 장날을 활용해 본격적으로 시위를 시작합니다 호미랑 빗장을든 해녀들은 하도리에서 세화장을 거쳐 제주읍까지 시위를 이어갔는데요 구좌면장은 해녀들의 요구사항을 이행하겠다고 했지만 약속은 또 지켜지지 않았어요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의견을 제시해도 들어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해녀조합은 거세게 반발하며 채취물에 대한 지정 판매를 강행하기로 합니다 분위기는 구자명과 성산면에 해녀들에게까지 확산됐고 결국 지금의 제주도지사인 제주도사를 만나 직접 담판을 지키러 합니다 그리고 1월 12일 대망의 결전의 날 호미와 비창을 휘두르면서 세화장으로 향한 해녀들은 그곳에서 제주도사를 만납니다 벽에 가로막힌 듯 답답한 상황은 이어졌지만 쉽게 응해주지 않는다고 물러설 해녀들이 아니죠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마음으로 똘똘 뭉치는 우리 조상들은 더욱 강경히 나갔고 지정 판매 반대 해녀 조합비 면제 일본 상인 배척 등을 이행할 것을 약속받습니다 결과적으로 제시한 요구조건에 대부분이 받아들여지는 성과를 얻어낸 거예요 1931년 12월부터 1932년 1월까지 17,000여 명이 참가한 항일운동 여성인 해녀들이 주요 주동자로 참여한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시간인 오늘은 해녀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해녀 하면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강인한 이미지가 왜 생겨났는지 조금은 이해가 가시나요? 우리 조상님들이 오랜 시간 인내하며 버틴 시간이 있기에 제주해녀, 제주 여성 강인하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게 아닌가 싶은데요 저도 제주해녀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를 접하고 조금은 애석하기도 하지만 그 어려움을 딛고 일어난 제주 해녀 분들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제주해녀의 전통문화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제주해녀 이유정이우다 또 보게마씸 K-오션MOO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