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밥도둑’ 명란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나요?
우리 전통음식 명란의 역사를 소개합니다!
명란젓부터 명란을 이용한 빵, 마요네즈 등
다양한 제품으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명란!
한반도를 넘어 일본인의 밥상에도 올라가는 명란이
사실, 우리 전통음식이라는 것, 알고 있나요?
1652년 승정원일기에는 ‘명란’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남겨져 있고,
1700년대 일본인이 집필한 ‘교린수지’라는 기록에는
명태가 한반도 함경도에만 산다고 적혀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명란은 우리 전통음식에서
일본인의 국민 밥반찬이 된 걸까요?
명란의 잊힌 이야기, 그리고 부활스토리를
대한민국 수산식품명인 제11호인 장종수 대표와 함께 알아볼까요?
[바다가 보이는 이야기] 네 안녕하세요 저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2대째 명란을 만들고 있는 덕화명란의 대표 장종수라고 합니다 저는 국내 수산 음식 중에서도 우리가 원조로 알려져 있는 명란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분들께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명란을 만들기 위해서 관심을 가지고 오랫동안 연구하다 보니까 다른 분들은 잘 모르는 이야기를 제가 많이 알고 있더라구요 한반도가 주목하고 또 개발하고 오랜 기간동안 먹어 오면서 우리 곁에 존재에 왔었던 명란 그 중에서도 오늘은 한동안 잊혀져야 했던 명란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장종수 (주)덕화푸드, 대표, 대한민국 수산식품명인(제 11호)] [잊혀진 전통음식 명란의 역사 명란이란 무엇인가?] 우선 명란이란 무엇인지 일반적인 설명에서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명란은 이렇게 명태라는 생선에서 나오는 생선알로 만든 음식입니다 그래서 명란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명태에서 출발을 해야 합니다 명태라는 생선은 이렇게 모든 부위를 버리지 않고 먹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머리는 육수를 내든지 젓갈로도 담가 먹고요 아가미는 서거리젓이라고 젓갈이나 깍두기로도 담궈 먹습니다 내장은 창란젓으로도 만들어 먹지요 그리고 명태알을 이용해 만든게 바로 명란입니다 명태 어장은 태평양을 끼고 북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서양에는 명태가 없어요 그래서 동아시아의 물고기가 된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요 동아시아의 역사와 함께해온 명란의 원조가 한반도라는 거 알고 계셨나요 자연히 역사 속에서 명란에 대한 많은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명란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 문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명란에 대한 세계 최초의 기록은 1652년 승정원일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명란에 대한 세계 최초의 기록 이게 중요합니다 이것이 한반도에 있다는 거 명란의 원조가 한반도라고 하는 사실에 대한 강력한 증가로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명태도 명란도 한반도가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다른 나라에서은 먹지 않을 때 유독 한반도가 여기에 주목하고 개발하고 먹은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수산 전통 식품입니다 승정원일기는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을 기록인데요 내용이 재밌어서 한번 읽어 드리면 연어알젓을 바치라고 했는데 없다고 해서 대구알젓으로 바치라고 했는데 실제 도착한 것은 명태알이다 명란젓이다 일이 혼란스럽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때부터 명태는 아주 흔한 다시 말해서 아주 많이 잡히는 동시에 조상들에게 사랑받는 생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 내용은 명란에 대해 기록된 세계 최초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또 한반도에 존재하는 명란에 대한 세계 최초의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명란의 역사는 이후로도 쭉 이어집니다 조선시대에 저술된 자료 중에는 아주 흥미로운 것도 있는데요 바로 1700년대에 부산에서 살았던 일본인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의 기록 교린수지입니다 교린수지는 일본인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일본인용 한글 교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이 교린수지에서는 명태가 함경도에만 산다고 한글로 적혀져 있습니다 이 문장은 명란의 역사를 다루는데 아주 중요합니다 함경도에만 산다는 표현에서 당시 일본에서는 명태를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학계에서는 일본이 식민지 시기 한반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명태라는 생선을 먹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이기도 합니다 서유구란 실학자를 아시나요 양반으로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실용 학문을 연구했던 그리고 요리에 대한 관심도 많았던 당시로서는 굉장히 독특한 이력의 실학자인데요 서유구가 남긴 난호어목지에는 지금의 백명란이라고 할 수 있는 명란 제법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명란 제법으로서는 세계 최초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당시 명란이 유통됐던 경로까지 아주 생생히 적혀 있는데요 주목할 점은 부산이 명란을 유통하는 중요한 지역으로 암시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거 명란의 가격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궁금증을 해결할 열쇠는 저 아래 지방인 전남 해남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완문이라고 하는 관아에서 발급하는 증명서를 보면 해남 백포지역의 보유 물품과 식료품 목록에 명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구체적인 가격까지 적혀 있는데요 명란은 1승의 7전으로 나와 있습니다 화폐 단위가 생소한 분들을 위해 쉽게 설명드리자면 북어 한 개 가격이면 20G짜리 명란이 한 알이었구요 명란 두 알은 생전복 하나의 가치에 다다랐습니다 이때 생전복은 지금의 양식정보과는 다르게 무척 비쌌습니다 심지어 명란은 조개젓보다 무려 70배가 더 비쌌고요 확실히 명란이 다른 수산물보다 비쌌다는 점 그만큼 귀한 음식이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명란을 주목한 나라가 또 있습니다 바로 바다 건너 일본입니다 일제강점기 명란은 일본 사람들 만나 조선의 대표적인 수산음식에서 더욱 더 발전하게 됩니다 명란은 일본으로 수출되며 국제와 산업화 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미묘한 민족적 선호에 차이도 드러나는데요 일본은 명태를 조선으로 수출하고 조선은 명란을 일본으로 수출합니다 그렇게 수출된 명란은 제국을 사로잡는 음식이 되어갑니다 명란 산업의 화려한 발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한반도의 명란은 품질이 아주 우수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품은 조선산이 일본산보다 몇 배나 우수하나 가공이 부족하여 시장에서 적당한 가격을 못 받는다고 합니다 일본인이 남긴 조선으로의 출장 기록을 통해서 명란에 대한 일본인의 관심을 알 수 있는데요 한 일본 회사가 명란을 수입하기 위해 조선으로 출장을 기록으로 남긴 명태자 개발사라는 한 권의 책에는 명란을 담는 방법부터 경로까지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명란 시장에 일반적인 저염명란과 명백히 세법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죠 여기에서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정보 명란이 일본으로 수출됐던 과정 유통경로입니다 환경도 원산에서 직결된 명란은 부산으로 이동해 관부 연락선 지금의 부관훼리 노선을 타고 일본의 시모노세키로 집결된 걸 알 수 있는데요 이후 오사카 어시장 등 일본 전역으로 이동됐다는 것까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료가 나는 환경도 원산뿐만 아니라 유통경로로서 부산 역시 이미 명란의 중심지역으로 역할을 하고 있던 셈인데요 부산이 일제시기부터 항구로써 항만 물류로서의 중심지이며 대륙을 향한 철도의 출발지였던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앞서 실학자 서유구가 남긴 난호어목지에 최초로 명란 제법이 실렸다고 말씀드렸었는데요 조선총독부의 전신인 한국통감부에서 만든 자료 한국수산지에도 근대화 이전 원래의 명란제법이 실려 있습니다 한국 수산지는 일본이 조선의 수산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고 기록한 것인데요 여기에 젓갈로서 명란을 만드는 법 즉 명란을 만드는 레시피가 상당히 자세히 담긴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방인의 시각에서 자세한 관찰이 특징인데요 여기에 나온 명란을 만드는 과정 제법 기록을 토대로 당시에 명란을 만드는 방식 그리고 염도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기록에 적혀진 방식 그대로 명란을 만들었을 때 명란의 염도는 약 14에서 15%로 추정해 볼 수 있는데요 1900년대 초에는 다소 낮은 염도로 명란을 담가 먹었으며 명란이 거의 겨울철에만 한정적으로 유통되어 먹었던 음식이었던 것으로 초청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신문에는 명란이 요리로써 신문에 자주 실리기도 했습니다 물컹물컹해도 보통 맛이 씩씩합니다 라고 명란의 식감이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맛이 씩씩하다라는 표현 정말 재밌지 않습니까 명란은 움파라는 식재료와 곁들여 먹기도 했고 조치라고 불리는 찌개 두부와 같이 곁들여 먹은 것을 알 수 있는데요 명란과 두부의 요리적 궁합이 가장 좋았던 것으로 보이고 지금도 명란과 두부를 함께 요리하는 레시피는 현재도 인기가 아주 많습니다 또 여기 보시면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과자죠 호원당을 설립한 조자호 선생님이 신랑 신부의 저녁상으로 겨울에는 명란조치를 추천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명란이 신문에 실린 시기를 보시면 주로 11월에서 12월 즉 명란이 겨울에 먹는 음식 겨울 음식으로 익숙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거기다 명란은 일제시대 신문의 상품시황란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상품시황에는 주요 상품들의 시세 변동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지금으로 따지면 쌀 김치 우유 등 주요한 식당 국가를 구성하는 식재료 가운데 명란이 있었다는 것이죠 명란이 상품 시장에도 실릴 정도로 가장 중요하고 또 친근한 음식이었다는 점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명란이 우리에게 친근하고 친숙한 식재료이자 음식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시대를 보면 명란에 이렇게도 우리에게 친숙한 음식이었나 하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반도가 개발한 명란은 지금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가 가까이 있던 음식이었습니다 명란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 지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은 명란에 대한 잊혀졌던 이야기를 함께 나눠 보았습니다 이번 강의를 듣고 보니 식탁에서 보던 명란이 조금 다르게 다가오지 않나요 다음 시간에는 한반도에서 출발한 명란이 어떻게 더 일본을 사로잡았는지 그렇지만 왜 우리에게서는 잊혀졌는지 하지만 잊혀졌던 명란이 어떻게 부활하게 됐는지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명란의 대를 잇는 남자 장종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K-오션MOO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