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해양 세계에 대한 유연한 태도였던 ‘열려있는 바다’와 16세기, 주도적인 힘이 존재하지 않는 ‘경합하는 바다’를 거쳐 18세기, 충동보다는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공생하는 바다’까지.
기존의 육지에서 바라본 역사와는 다른 바다에서 바라본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기본적으로 중립적이어서 누군가의 일방적인 소유가 될 수 없었고 때로는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던 전근대 바다로의 여행을 떠나볼까요?
안녕하세요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최근에는 해양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조영헌입니다. 저의 본래의 연구 주제, 즉 지난 20년 동안 연구한 주제는 중국의 사회경제사, 특히 ‘대운하를 둘러싼 물자 유통과 상인들의 성공 비결의 상관관계가 무엇이었는가’라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내륙에 설치된 인공 수로 대운하에서 외국으로 연결된 해양과의 교류나 표류의 역사로 관심이 확장되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시기는 세 시기가 있는데요. 이 세 국면은 대략적으로 13세기, 16세기, 그리고 18세기에 해당합니다. 중국의 왕조로는 각각 원, 명, 청 시기에 해당하고요. 우리나라로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해당하죠. 먼저 본격적인 세 국면을 이야기하기 전에 ‘바다를 통해 본 역사’는 기존 역사와 어떻게 다를까? 이 문제를 잠깐 말씀드려야 될 것 같아요. 왜냐하면 기존 역사는 아무래도 이 땅에서 본 역사이기 때문에 바다에서 본 역사와 같은 것도 있지만 다른 것도 많기 때문이죠. 가령 1976년 신안 앞바다에서 인양된 ‘신안선’ 이게 과연 누구의 배일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신안선은 한국의 배처럼 오인되기 쉽습니다. 실제로 신안선 유물은 대한민국이 소유하고 있고 또 현재 목포해양박물관(목포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안선은 우리나라의 배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배는 1323년 무렵 중국의 영파(寧波)에서 일본 하카타로 출발한 무역선이기 때문이에요 ‘신안선’에 ‘신안’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마침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했기 때문일 뿐이죠. 선박의 자재나 구조 뭐 이런 걸로 보면 이것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정크선, 바로 중국의 배입니다. 그런데요. 배의 짐에 포함된 목간(木簡) 나무로 만든 편지 같은거죠. 나무로 만든 목간(木簡)에 일본 사찰의 이름 등이 기재되어 있어요 또한 선상 생활 도구를 보니까 중국 냄비, 수저 혹은 일본의 옻칠 공기나 게다(일본식 신발) 이런 것들이 다수 발견됩니다. 승조원 역시 중국과 일본의 혼성팀이었어요 그렇다면 신안선은 일본선입니까? 중국 배 일까요? 아니면 한국 배 일까요? 하나로 딱 꼬집어 말하기 곤란합니다. 대략적으로 그냥 ‘동아시아의 배’ 이렇게 말해야 좋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해양사의 관점이라고 하는 것은 육지의 관점과는 좀 달리 나라와 민족의 구분이 딱딱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 그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혼종이 되기도 하고요. 다국적이 되는 것 그래서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서 오히려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 그것이 바로 전근대 바다 세계의 특징입니다. 경계가 명확한 일국사적 시각과도 좀 다르죠. 그래서요 글로벌 시대, 다양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교류하는 미래 지향적인 역사관으로 해양사가 주목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이 점을 좀 염두에 두고 세 가지 국면을 이해하면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제 바다를 통해 본 첫 번째 국면, 13세기 몽골제국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이 바다를 통해 동아시아를 볼 때 흥미로운 첫 번째 시기는 13세기입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보면 13세기 중엽에서 14세기 중엽까지의 한 백여 년 인데요. 중국의 왕조로는 남송 시대에서 원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시기였고요. 또 원을 건립한 몽골제국이 초원지역에서 막 시작해서 유라시아의 거의 전 지역을 지배하게 된 바로 그 시기입니다. 당시 몽골제국은 동쪽으로는 이 한반도의 고려에서부터 시작해서 서쪽으로는 서아시아 그리고 러시아 평원까지 연결되는 그야말로 세계에서 아마 가장 큰 제국으로 급성장했고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13세기 몽골제국부터 오늘날 우리들에게 익숙한 ‘세계화’ 세계화(Globalization)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말입니다.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부터 말이죠. 그렇다면 몽골제국 시기에 동아시아의 바다는 과연 어땠을까요? 몽골제국이 진정한 세계화를 가능케 한 아주 거대한 제국이었던 만큼 동아시아의 바다 역시 국제적인 해양 교역에 대해 “열려 있는 바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활발한 교류가 바다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유라시아 대륙과 인도양을 순환하는 사람, 물품, 문화와 정보의 이동이 매우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 바로 그런 시기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도요. 고려가 해양 교역에 활발하게 참여했던 것 아마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텐데 바로 이 시대와 관련이 있습니다. 중국의 전근대 수천 년의 역사 가운데 가장 해양 교역이 활발하게 진행된 시기가 바로 13세기 중엽부터 14세기 중엽 즉 남송에서 원으로 이어지던 바로 이 시기였던 겁니다. 이 시대 동아시아의 이 해양 세계를 보면 크게 세 가지 특징을 보입니다. 하나는 유라시아 대륙을 동서로 연결한 몽골제국의 영향을 받아서요 동아시아의 해양 교류 역시 인도양까지 아주 광역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이에 따라서 페르시아 상인들도 남중국해로 자유롭게 원활하게 왕래를 시작했고 중국의 해양 지식 역시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을 넘어 페르시아 지역까지 넓어집니다. 당시 이러한 광역의 바닷길을 이용해서 왕래하면서요 기록을 남긴 유명한 사람들이 있어요 바로 이탈리아인 마르코 폴로, 모로코 출신의 무슬림인 이븐 바투타입니다. 그리고 마르코 폴로와 이븐 바투타가 모두 찬사를 보낸 동아시아 최고의 해양도시가 있었는데 중국 복건성에 위치한 천주(泉州)입니다. 당시에는 ‘짜이퉁’이라고 불렸던 지역입니다. 둘째로, 이 시기에 민족적으로 또 종교적으로 굉장히 다양한 ‘외래자’ 바깥에서 온 사람들이 활발하게 왕래하는 동시에 각지에는 그들이 만든 커뮤니티가 활발하게 만들어집니다. 그 결과 계절풍을 이용한 해상 교통망이 형성되고 이를 따라 해상 교류의 네트워크가 아주 광범위하게 형성되었습니다. 특히 아시아 해역 각지의 무슬림 커뮤니티와 이 중국 상인 커뮤니티는 ‘종교와 상업 네트워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나갑니다. 일본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승려의 수 역시 14세기에 가장 많았다고 하죠. 셋째, 연해 각지의 다양한 정치권력이 해상무역에 대해서 비교적 온화하거나 또 매우 유연한 관리체제를 보인다는 점도 이 시대의 특징이에요 때로는 무역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진흥하려고 하는 왕조도 있었습니다. 남송이나 원 제국이 그러했고요. 고려와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들 정치 권력은 주로 이 항구도시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바다를 왕래하는 사람들의 활동을 통제하려고 했었는데요. 앞서 언급했던 중국의 천주를 비롯해서 광주(廣州) 또 일본인 왕래가 많은 경원(영파, 寧波) 또 일본의 하카타 그리고 고려의 예성항 등이 그 대표적인 항구도시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절한 통제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이 상거래와 해양 교역의 안정성이라고 하는 것을 확보할 수 있었던 시기입니다. 이 통제가요, 너무 강력해지면 해양 교류는 위축됩니다. 반대로 이게 너무 통제력이 없어도 문제가 되는데요. 오늘날 우리가 오키나와라고 알고 있는 그 류큐나 제주도처럼 국가의 관리가 약했던 당시의, 그 당시의 섬은 그 당시 사람들한테는 식인 전설이 생길 정도로 해양을 왕래하는 상인들에게는 아주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건 바로 이러한 사례를 잘 보여주는 겁니다. 이처럼 세 가지 특징을 가진 13세기 중엽에서 14세 중엽까지의 첫 번째 국면에 몽골의 패권 하에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그리고 인도양, 지중해 등 해상 교류의 여러 핵심 지역들의 연결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이 유라시아 대륙이 육로와 해로를 통해서 거대한 환류 네트워크를 형성했다고 볼 수도 있는 거죠. 이를 통해 사람, 물품, 그리고 정보 이 3가지가 이전과는 아주 달리 놀라울 정도로 원활하게 유통되었기 때문에 이를 ‘환유라시아 교류권’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환유라시아 교류권’이라고 하는 것은 환은 둘러싼다는 뜻이거든요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유라시아 대륙을 둘러싸는 유비쿼터스와 비슷한 이러한 교류권이 ‘육상과 바다로 연결되었다’라고 볼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육상과 해상 교류의 가장 핵심적인 중심지도 있었는데요. 그건 바로 원 제국의 수도였던 대도, 즉 지금의 베이징(북경, 北京)입니다. 당시 곡창지대는 중국의 강남 지역이었는데, 여기서 징수된 곡물이 수도의 베이징(북경, 北京), 대도까지 운송이 되는데요. 이를 위해서 쿠빌라이 칸은 대운하 제가 전공하는 대운하를 새롭게 정비하지만 실제로는 해상으로 유통되는 수송되는 해상 유통이 더 활발하게 이루어집니다. 대운하 전문가인 저의 눈에도 이러한 원 나라의 곡물 수송 즉 조운 시스템은 매우 흥미롭게 여겨집니다. 대운하와 해로를 모두 활용하는 몽골 통치자들의 조운 시스템을 통해서 어디 하나에 완전히 올인하기보다는 실용적인 목적에 따라서 자유롭게 활용하는 융통적인 모습을 보기 때문이죠. 조운이라고 하는 것은 수로를 통해서 곡물을 운송하는 시스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몽골제국은 이 빠른 시기에 거대한 세계 제국을 건립하고 육상과 해상 네트워크를 융합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이 점이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데요. 베이징(북경, 北京)이 유라시아 대륙과 해양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에 베이징(북경, 北京)과 가장 가까운 외국, 바로 고려였습니다. 고려가 원의 간섭을 받았던 고려시기 역시 이처럼 거대한 ‘환유라시아 교류권’에 자연스럽게 포섭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반강제적이긴 했지만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 원의 수도인 대도를 왕래하는 고려의 사신들은 ‘환유라시아 교류권’의 최신 정보, 유행을 접할 수 있었고요. 또 일부를 유입해 올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제주도 역시 몽골에 말을 제공하는 거점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후 한반도의 역사 속에 제주도가 본격적으로 편입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 첫 번째 국면에서 동아시아 해양 세계는 ‘열려 있는 바다’라고 부를 수 있겠고요. 그 특징은 해양 세계에 대한 다소 ‘느슨함’ 혹은 ‘유연함’이라고 표현해볼 수 있겠습니다. 자, 이것으로 첫 번째 국면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다음에 이어서 두 번째 국면에 대한 이야기를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