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바에서 지렁이, 해파리에서 물고기, 고래에서 호랑이, 나비와 새들 모두가 지구에서 자기 몫의 의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특별합니다.”
15년에 걸쳐 한반도 전역의 바닷물고기 528종, 민물고기 233종을 합해 750여 종의 물고기를 2천여 점의 세밀화 도판으로 완성한 조광현 화가.
지느러미의 위치, 가시의 개수, 비늘의 방향까지 정확하게 재현해야 했기에 때로는 한 종류의 물고기를 그려내는데 몇 년이 걸리는 작업을 지구 생명과 해양 세계에 대한 애정으로 완성해낼 수 있었던 과정을 들어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바다와 지구생명을 너무도 사랑하는 화가 조광현입니다. 시인은 언어와 문자를 사용해 진실을 노래하듯 화가는 색과 형태를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포착하려 합니다. 저는 특히 세상에 가득한 생명체들이 가진 온갖 무늬와 색채에 매혹되어서 오랫동안 많은 그림들을 그려왔습니다. 먼저 제가 그린 그림 한 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그림은 ‘세밀화’로 그린 ‘참돔’입니다. 아름다운 분홍색의 몸에 에메랄드 보석알들이 흩뿌려진 듯 한 반점 무늬가 반짝이는 신비로운 모습의 물고기입니다. 또한 우리가 가장 맛있게 먹는 고급 생선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요 도미과에 속하는 생선 중 하나이며, 주로 대한민국, 일본, 동남중국해, 대만, 홍콩, 베트남 북부에서 서식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남해와 제주 바다에서 많이 잡히고 있습니다. 다 자라면 몸길이가 1m를 넘기도 하는 중형 물고기로서 그 화려한 자태와 눈 위의 영롱한 푸른 광채로 ‘바다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기도 하지요 저는 이 물고기를 그릴 때 머리 몸통 꼬리의 비율은 물론 비늘의 개수, 무늬, 색깔, 질감과 미묘한 광택까지 최대한 사실 그대로 자세하게 그림을 그립니다. 이런 그림들을 ‘세밀화’ 영어로 ‘사이언티픽 일러스트’ 라고 하는데요. 저는 오랫동안 생명과 그를 둘러싼 세계를 주제로 한 작업을 해온 화가로서 특히 한반도 전역의 민물고기와 바닷물고기들 거의 모든 종(種)을 그리는 장기간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얻은 ‘물고기 세밀화가’ 라는 명칭으로 저를 소개하면서 오늘 강연을 진행하겠습니다. 사실 저는 지구생명과 특히 해양세계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만 제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어떻게 물고기 세밀화를 그리게 되었나요?”입니다. 이 수없이 많이 받은 질문의 답은 지극히 개인적인 출발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전문적인 화가가 되기 위해서 미대 진학을 위해 준비를 하게 되죠. 그래서 본격적인 기초 연마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때 시각 훈련 삼아 야외 스케치를 많이 다니곤 했습니다. 사진을 보면서 실내에 앉아서 그리면 감동도 없고 훈련도 잘 안 됩니다. 실제로 현장에 가보면 온갖 것이 다 뒤섞여 있어서 그리기가 어렵지만 생생한 표현 능력이 증진되고 훈련된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꽃 한 송이를 그리려 해도 주변의 덤불과 온갖 것들이 섞여서 무성히 얽혀있고 바람이 또 불면 생동감이 또 달라지고 그래서 옛날부터 화가들은 현장 작업을 많이 다녔습니다.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는 감각을 깨우려면 현장만한 게 없으니까요 세월이 흐른 뒤에 어느 땐가 얻게 된 작업실이 갯벌 근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갯벌을 나가 여러 가지를 관찰하고 그리게 되었죠. 저는 그 속에서 육상의 숲과는 전혀 다른 신비로운 생명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게들과 조개들, 해삼, 낙지, 갯지렁이, 갖가지 종류의 고둥들, 바닷새들 수없이 많은 기이한 자연의 창조물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 얽혀 살아가는 경이로운 곳 달의 인력에 이끌려 오가는 밀물썰물 우주의 리듬에 맞춰 일상이 돌아가는 광대한 신비로운 세계 너무도 깊은 감동에 그때부터 저의 그림 방향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개인적인 작업들이 ‘갯벌’ 이라는 주제의 개인전시회와 책 출판으로 매듭되고 더 먼 바다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으로 스쿠버다이빙 자격까지 따고 전 세계의 바다를 누비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지요 괌에서 사이판으로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평양과 인도양을 탐사하며 너무도 가슴 가득히 벅차오르는 해양세계의 아름다움과 신비에 숨이 막힐 지경으로 너무도 행복했습니다. 제가 물고기 세밀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 이 때의 일이었습니다. 모 출판사에서 ‘우리바다 물고기 도감’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단순히 사진을 넣는 것이 아니라 정밀한 물고기 그림이 필요하다며 제작을 의뢰해 온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되면 제가 그렇게 좋아하는 바다에 탐사한다는 좋은 핑계로 갈 수 있겠구나! 라고 크게 고민하지 않고 수락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3,4년 쯤 걸릴거라 예상했던 작업이 무려 15년이나 걸릴 줄 생각도 못했던 거지요 <한국의 민물고기>와 <한반도 바닷물고기 세밀화 대도감> 두 권의 책에 실린 바닷물고기 528종 민물고기 233종 합해서 750여종의 물고기들 총 2천 여점의 세밀화 도판들이 제작되었습니다. 이 방대한 작업을 진행하면서 해양생물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늦은 나이에 대학원으로 진학해서 해양생물학 관련 석사학위도 받게 되었습니다. 물고기 세밀화 그림을 그릴 때 종 목록도 학자와 협의해서 어떤 종을 다룰 것인가 리스트를 작성해야 되고 작성된 리스트를 바탕으로 물고기 관련 자료를 모으는데 희귀종도 그 중에 참 많아서 그릴 때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어떤 물고기는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총 5년이나 걸리기도 했었죠. 보통은 직접 바다 속에 다이빙해 들어가서 수중촬영으로 찍고 자료를 모으거나 전문기관에 자료를 요청하기도 하는데 논문이나 도감과 같은 자료는 세계 곳곳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고 주변 루트를 통해서 구하고 수집하고는 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자료들을 바탕으로 그림을 재구성하기 시작합니다. 그냥 사진을 보고 베끼는 게 아니고 여러 정보를 모아서 다시 재구성을 하는 것이죠. 등지느러미 가시가 나란히 있는데 이게 몇 줄이고 꼬리의 결은 몇 가닥이고 눈 모양, 아가미 모양, 비늘의 열 등등 모든 자료를 일일이 분석하고 분류학적으로 연구해서 그 종의 본모습을 재구축해내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모습은 이 종의 기록으로서 영원히 우리의 자연사에 남는 것이지요 이 그림 한 장은 논문 수 편과 맞먹는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물고기는 금방 그릴 수 있습니다. 고등어나 꽁치 이런 종류는 시장에 가서도 흔하게 볼 수 있으니까요 직접 수족관을 설치해서 키우면서 관찰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선에 올라타서 갓 잡아 올린 물고기들을 잡아서 관찰하고 그리기도 했어요 그러면 대부분 어부들은 엄청 귀찮아하죠.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저는 예술 한답시고 옆에서 귀찮게 물고기나 만지작 거리고 있으니 뭐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그런데 심해나 먼 바다에 사는 희귀종들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국 도감들, 논문들, 사진 자료와 목격담 등등 모을 수 있는 모든 자료들을 종합해서 그야말로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더 정확한 자료나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이 그림이 현재로서는 가장 정확한 기록이라고 보는 거죠. 흔히들 하는 질문 중 또 하나는 ‘왜 그림으로 남기는가?’ ‘사진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라는 물음입니다. 우리가 사진으로 보는 것은 바다 속에서 찍히는 수중사진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다에 들어오는 햇살의 양, 수심에 의해 흡수되는 빛의 파장 그리고 수중촬영에 필요한 조명의 종류, 세기 등등에 따라서 고유의 물고기 색깔이 정확하지 않고 늘 빠르게 움직이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정확한 모습을 잡아내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입니다. 또한 물 위로 잡아 올린 물고기들은, 대부분 바로 죽어버리고 색깔이 변색되거나 섬세하고 얇은 지느러미들이 들러붙거나 찢기고 상하고 또는 몸통의 모양은 또 뒤틀리고 여러 변수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진으로 보는 바닷물고기의 대부분은 사실 본래 그 모습이 아닌 것들이 많은 것이죠. 그래서 세밀하게 남겨야 할 그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연을 맺게 된 바다와의 인연은 또 다른 재미있는 생각을 낳게 되었습니다. 현장 작업을 다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든 거예요. “아예 바다 속에 들어가서 그림을 그려보는 건 어떨까?”라고 말입니다. 제가 화가이기도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물속 세상의 아름다움에 홀려서 스쿠버 다이버가 되었습니다. 바다 속에 들어가서 보는 세상은 지상과 많이 다릅니다. 그 조용한 세상 속에 사는 해양 생물들은 각자의 속도대로 움직이고 살아가며 하나의 세상을 완성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 조화로움에서 감동을 많이 느낍니다. 조사를 해보니까 외국에서는 수중페인팅 작업이 간간이 이루어지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2012년 작은 캔버스 하나랑 붓과 물감 몇 개를 들고 제주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바다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캔버스를 고정하고 작업을 시작했는데 물살 때문에 그림을 그리다가 붓을 놓치면 부력 때문에 날아가고 날아가면 헤엄쳐서 쫓아가서 다시 잡아오고, 가지고 오고 그렇게 1차로 그림을 그린 뒤에 화실로 가져와서 나머지를 완성시켰습니다. 그렇게 몇 번의 작업을 하다보니까 요령이 생기더라고요. 붓도 날아가지 않게 잘 묶어두고 캔버스를 고정할 금속 이젤과 특별히 제작한 화구박스도 가지고 내려가고 그렇게 점차 작업하기 수월해졌습니다. 돌돔이 등장하는 한 풍경을 그리고 있었는데 돌돔 그림 위로 진짜 돌돔 한 마리가 쓱 지나가는 것입니다. 자기 모습을 알아보는지 모르겠지만 신기한지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그림 앞을 자꾸 오가는 거예요. 마치 신라시대 솔거의 일화를 보듯이 그런 생각이 나서 참 저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기억입니다. 2020년경 모든 작업을 마무리하고 간행하게 된 민물과 바닷물고기 도감들은 우리 역사상 최대 규모로서 한반도에 서식하는 거의 전 종의 물고기들을 수록한 기념비적 저작물로 인정 받아서 출판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바다로 갔었던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물고기 세밀화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